책 사는 걸 주체할 수 없음



굳이 따지자면 나는 식탐보다도 향학열이 더 더럽고 돼지새끼 같다고 생각한다(아무튼 모든 욕망은 돼지같다). 음식은 아름다운 것이다. 몸에 들어가면서 혀에 기쁨을 주고 소화기관을 돌고 돌며 생명체를 움직이게 하고 결국엔 거름이 되어 나온다. 음식은 아무튼 존나 맛있으므로 아름다운 것이다.
나는 먹는 기쁨이 다른 어떤 기쁨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먹음은 인간이 바깥 세상을 "받아들이는" 가장 물리적이고 직접적이고 효과적인 수단이다. 사람은 먹어야 한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사람은 굳이 책같은 거 안 읽어도 된다. 플라톤... 개새끼... 공자... 걔네가 자꾸 그래서 사람이라면 꼭 아는 게 많아야 할 것 처럼 느껴지는데 그건 강박관념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언어를 통해 소통하며 언어가 기본 관념이 되는 인간들의 문명 사회에서 인정 받고 사랑 받으며 가치있다고 '여겨지는' 삶"을 살기 위해선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봐라, 존나 이기적이고 가식적이며 허영스럽지 않은가. 인정받고 사랑받고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삶이라니. 철학박사에겐 성형 좋아하는 한국 여자들을 욕할 자격이 존나 없다. 둘다 더 나은 인간이 되어 더 사랑 받고싶고 더 좋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고 보다 많은 기회를 얻고 싶은 욕망은 존나 똑같지 않은가.


그런데 나는 책 사는 걸 좋아한다. 솔까말 사는 걸 읽는 것 보다 더 좋아한다. 수치로 따지자면 독서를 좋아하는 마음은 젊은 드래곤과의 관계 정도고 도서 구매를 좋아하는 마음은 청년 무관과의 관계 정도다(프메투 안해본 사람은 이해 못함). 어차피 인간이 두뇌 속에 집어넣을 수 있는 정보의 양에는 한계가 있고 나는 그게 몹시 불만스럽다. 인터넷에 즐겨찾기 해둔 유용한 웹사이트들도 언젠가 폐장하든가 포맷하든가 컴을 바꾸는 순간 쉽게 사라질 뿐더러 그러지 않더라도 내가 까먹으면 그만이다. 그에 비해 책은 사두면 발에 채이고 귀찮고 거치적거리고 무겁고 먼지가 싸이거나 해서 존재감이 뚜렷하다. 책은 어쨌든 쌓아두면 언젠간 읽는다. 무엇보다도 책은 내가 "지식을 소유했다"는 만족감을 느끼게 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태어난 연월일이나 건륭제가 언제 목란수렵제를 시작했는가 따위가 불현듯 궁금할 때 언제든지 펴볼 수 있다. 그러면 나는 어떤 사실도 암기할 필요가 없게 된다. 원래 가진 자는 수고할 필요가 없고 그러므로 점점 멍청해지는 법이다.


책을 수집한다는 건 원정군이 정복지를 후려서 여자랑 금 캐가는 것 처럼 인생으로부터 전리품을 얻는 일이랑 똑같다. 와,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존나 못된 짓이잖아. 그러니까 창고에서 썩는 냄새가 나도록 재물을 차곡차곡 쌓는 거다. 재물을 실질적으로 사용하느냐 마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재물은 그저 존재하기 위해, 가진 자에게 만족감을 주고 못 가진 자에게 열등감을 주기 위해 존재한다. 그런 식이다. 나는 인생의 갖은 경험들, 과거의 잔해물들, 지구 반대편이나 우주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룬 책"들을 사서 그걸 내 방에 쌓아두고, 기뻐하고, "가졌다", 즉 "내 세계의 일부로 귀속시켰다"는 기쁨에 젖어 낄렵댄다. 나는 책을 사면서 도자기랑 서예 작품을 긁어모은 건륭제(건륭제 얘기 자꾸 해서 미안하지만 최근 마이붐임)라든가, 16~18세기에 "동방(이 뭘 뜻하건 간에)"에서 사들인 진귀한 물건들을 수집하는 귀족 백인 남자나, 떠돌이 행상한테 악마의 팬던트 세 개 사둔 프메투 플레이어처럼 존나 만족감을 느낀다. 그런다고 내가 그런 부자새끼들처럼 진짜 카르티에의 미스터리 클락이나 진짜 입생로랑의 몬드리안 드레스를 사서 보관할 수는 없기 때문에 책을 사는 거다. 책은 정말 좋다. 아무 것도 가지지 않았는게 가진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해준다. 무설탕 캔디처럼.


몇 년 전부터 노리고 있는 책은 Taschen사의 Cabinet of Natural Curiosities랑 Circus라는 책이다. 아니 Conjoined Twins: Developmental Malformations and Clinical Implications 먼저 사고 싶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두근거리고 숨이 가빠온다. 심지어 오늘 갔던 헌책방에선 캐셔 언니가 상서로울만치 이뻐 보이기도 했다("책장 효과", 책장 근처에서 사람을 보면 왠지 모르게 그 사람이 더 이뻐 보이는 현상). 분위기 타서 정신 못 차리고 헌책을 오만원어치 주문했다. 나는 정말 더러운 돼지다.



*화장품 다 썼다 사러 가야된다... 사러가기 싫다... 진짜 눈물 나오도록 싫다... ㅠㅠ 실제로 쇼핑하기 너무 싫어서 눈물 나왔던 적이 있음. 뉴욕 있을 때. 공짜로 받은 플라스틱 도마가 너무 개쓰레기라 새걸 사야되는데 사기 위해 나가기가 죽도록 싫었다. 지나치다 사도 되지만 "그까짓 걸 위해 산다는 결단을 내리느라 맘고생하고 결제하고 들고와야 한다"는 사실이 정말 너무너무 싫었다... 진짜 병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도마 쓸 때마다 너무 쓰레기라 아무 것도 안 되니까 매일 사야겠다고 다짐하면서도 끝내 못 샀다. 그런 식으로 나는 좀 비상식적일 정도로 당연한 물건을 없이 사는 경우가 왕왕 있다(선크림 프라이머 운동화 겨울부츠 패딩코트 etc). 그나마 엄마랑 같이 살 땐 엄마가 알아서 사주고 하니까 못 느꼈는데 유학하고 자취하면서 알게 됐다. 나는 기본적으로 쇼핑을 정말 죽도록 싫어한다는 걸...
아... 그니까 화장품 대체 언제 사지 매일 나가니까 사진 사야되는데 눈 감았다 떠보면 생겨있었으면 좋겠음.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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